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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책 읽기 - 로망과 현실 그리고 변수오늘의 어떤 것/오늘의 잔상 2020. 3. 27. 18:48
2020년 3월 27일 금요일
날씨가 끝내주게 좋은 날.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새파랗고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봄날의 하늘이었다.
집에서 뒹굴 거리며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손에 자꾸 잡히는 것은 책이 아닌 휴대폰이었다.
이러다가 읽어야 할 책을 몇장도 못 읽을 것 같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 공원에 가서 따수운 햇살도 받고 노래도 들으며 책을 읽자!
돗자리 생각이 났으나 돗자리를 펼칠 만한 공원은 없었으므로 돗자리는 챙기지 않았고
아쉬운대로 아끼는 예쁜 텀블러에 마실 물을 담아 챙기고,
좋아하는 과자인 아몬드 빼빼로 한개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읽을 책 두권과 노래를 듣기 위해 꼭 필요한 이어폰과 핸드폰을 챙겨 문 밖으로 나섰다.
아직도 동네엔 코로나 확진자가 꾸준히 늘고 있어서 마스크는 필수 중의 필수다.
후드티에 후리스를 입고 그 위에 두꺼운 조끼패딩을 입었는데 날이 워낙 따뜻해서
너무 두껍게 입었나 ~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으려면 얇은 거 보단 낫겠지 생각하다보니 공원에 도착했다.
참 신기한 게 이대로 봄이 오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징글징글했던 겨울이 어느새 가고
공원에는 나무마다 새 잎이 돋고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오후의 햇살은 집에서도 잘 드는데도 바깥에서 직접 쬐는 햇빛은
다른 느낌이다. 어느새 성큼 와버린 봄을 온 몸으로 만끽한다는 게 가장 큰 차이겠지.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며 책읽기 좋은 장소를 찾아보았다.
적당히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너무 시끄럽지 않으면서 등받이가 있는 벤치를 찾아야했다.
벤치가 많으면 좋을텐데 작은 공원이라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공원 입구 쪽 벤치는 차도와 가까워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음이 반갑지 않았고
무대 앞의 여러 벤치가 있는 곳은 나무그늘에 가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일조량이 없었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놀이터 앞 몇개의 벤치 쪽이었는데..
차도 보다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낫고 책 읽으면서 문득 고개를 들면
애들 노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분명 집에서 공원에 나가 책 읽기를 상상했을 땐 이런 치밀한 선택을 해야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나는 까탈스럽구나.
자리를 잡고 챙겨온 책과 텀블러, 이어폰, 과자를 세팅해 사진을 하나 찍었다.
요즘 걱정이 되는 친구에게 안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친구도 좋은 봄햇살을 맞으며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어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또 하나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선택..
오늘 같은 봄 기운을 상큼하게 즐길 좋은 선곡이 필요했는데 그런 걸 미리 준비했을 턱이 없었다.
최신 챠트를 무작위로 돌릴 수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좀 더 신중한 선곡을 원했기에
약간 절망하려던 찰나, 평소 좋아하던 유튜버의 선곡리스트가 마침 보였다.
와 어떻게 알고 VIBE가 '좋아할 것 같아서'라며 나를 위해 이걸 보여주는 걸까, 세상 기술 참 좋아졌다 싶었다.
아니면 떼껄룩이 유명해져서 이제 바이브에도 선곡리스트를 넘겨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덕분에 딱 기분 좋을 정도의 상큼한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로 요즘 계속 집에만 있었는데 이렇게 따뜻한 햇살 받으며 책을 읽으니 기분이 좋았다.
노래도 좋고~ 고개를 들면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이 보였다.
'학교 개학도 계속 미뤄지니 쟤들도 하루종일 집에 있겠구나, 뭐하고 지낼까,
마스크 끼고 놀기 불편하겠다, 저렇게 잠깐이라도 놀이터에서 놀면 좋긴 한데
부모들은 그래도 걱정되겠다, 코로나는 언제 끝날까, 앞으론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하기도 하면서 책을 읽었다.
적당히 바람이 불기도 해서 내리쬐는 햇빛이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선선한 기분 좋은 날씨였다. 책이 술술 읽혔다.
기껏 챙겨온 물과 과자는 막상 먹으려니 마스크가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서
가져온 보람이 없었다. 마스크를 벗고 먹으면 되긴 하지만 아직 코로나 여파가
한창이기 때문에 아무리 야외라고 해도 마스크를 벗는 건 불안하다.
아쉽지만 물과 과자는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음번엔 그냥 챙기지 말아야지.
한시간 정도 책을 읽으니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과 부모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갔다.
가는 기척을 느껴 잠시 고개를 들었는데 내 시야의 왼쪽 구석에 뭔가가 걸렸다.
뭔가.. 결코 반갑지 않은... 누군가의 양말 신은 발 한쪽이.. 보였다.
옆 벤치엔 웬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신발을 벗고 하필이면 내 쪽으로
한 발을 쭈욱 뻗고 제 집 마냥 아주 편하게 앉아있었다.
이제껏 좋았던 기분에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만
자리를 옮기기엔 귀찮았으므로 그 몹쓸 장면을 등지고 책을 좀 더 읽었다.
그 자세론 5분도 안 되어서 허리가 아팠기 때문에 다시 자세를 바로 앉았는데
그 순간 시야의 왼쪽 구석에 이번에는 두 발이 보였다.
오 마이 갓이다. 진짜. 그 아주머니는 이젠 아주 드러누워서 얼굴은 겉옷을 덮어 가린 채
두 발을 내쪽으로 쭈욱 뻗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 아주머니는 적어도 발을 내 반대편으로 하고 드러눕는 최소한의 배려심조차 없단 말인가?
에휴.. 나도 진상이 되어 그 아주머니의 평온한 기분에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구태여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잡친 기분을 달래기 위해 결국 짐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좀 더 봄 햇살을 즐기며 책을 마저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무대 앞 벤치가 많은 곳으로 갔다.
나무 그늘이 앞으로 내려와서 햇살은 많지 않지만 입고 온 조끼 패딩 덕에 춥지 않게 있을 수 있었기에 괜찮았다.
다시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쳐 읽고 있던 단편소설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다.
남은 장수는 4장 정도 였는데 2장 정도 읽었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두명의 할아버지였다.
두 분은 친구인 듯 담소를 나누며 이 쪽 벤치가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중년을 넘은 아저씨가 두명 이상 무리 지어있으면 본능적인 경계가 발동하였기에
평온했던 내 상태는 순간적으로 굉장히 불안해졌다.
그래도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두명의 점잖은 시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다시 책을 읽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 두 분의 이야기는 방해가 되지 않을 터였다.
다만 만약에, 설마 만약에, 제발 안 그러길 바라지만 담배를 핀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다.
그래도 그 두 분이 앉은 벤치를 기준으로 바로 옆은 아니지만 벤치 하나 건너 양옆으로 사람들이 있으니
설마 담배를 피진 않으시겠지, 그저 조용히 담소만 나누며 봄햇살을 즐기시려는 분들이겠지 하고
어리석은 희망을 품었었다.
역시는 역시 역시였다. 두 분 중 한 분이 담배를 피기 시작했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갔다.
하.... 공원에서 책읽기라는 것에 너무 큰 로망을 품었구나.
야외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이렇게 연달아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반면 집은 내가 애써 세팅해놓은 평온함을 모르는 타인이 함부로 깨트릴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타인에게 평온함을 침범받는 것에 이렇게 충격을 받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집에서 생활하던 것에 그만큼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겠지.
아주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배려를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다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실망하고 분노하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아주 작은 배려를 기대하는 것조차 사실은 피곤한 일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눈에 보인다고 눈 여겨 보는 것도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세심함은 버리는 것인지 버려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람은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기 마련인 듯 하다.
그러니 그냥 이해할 생각도 하지 말고 내가 좀 더 예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제일인 것 같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최대한 빨리 눈치채고 시야에서 그걸 없애버리는 게 낫다.
비록 내가 쓸데없이 부지런해져야 하지만.
그래서 공원에서 책읽기를 앞으로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좀 더 벤치가 많은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멀어도 큰 공원에 가서 도망치듯 옮겨다니며 내 평온함을 지켜내야지.
그게 아니라면 동네탐방을 더 해서 적당한 나만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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